[만세운동 백년, 임시정부 백년] ‘장수산 선생을 아십니까’
[만세운동 백년, 임시정부 백년] ‘장수산 선생을 아십니까’
  • 최상혁 기자
  • 승인 2019.05.13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토사료가 김치성에게 듣는 장수산 선생’ 이야기
6월, 매꼴공원에 기념비 세울 예정 - 장곡동 출신의 3ㆍ1 독립지사

[시흥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김치성] 올 해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사회 각계에서 그 전개과정과 의미에 대한 재조명이 여느 해보다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3ㆍ1운동은 독립 의지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일거에 뿜어져 나온 혁명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확산으로 이어진 만큼 지역별로 이를 기념하는 사업들과 각종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시에서도 작년에 시작한 3ㆍ1 독립지사 기념비 건립사업이 올 해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시 지역 3ㆍ1운동에 관한 기록집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3ㆍ1운동과 만세시위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은 지역의 정체성 정립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3ㆍ1운동과 국외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시 지역의 경우,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북쪽은 부천군 소래면에, 남쪽은 시흥군 군자면과 수암면에 속해 있었는데, 3ㆍ1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던 3월 말 4월 초에 우리시 지역에서도 예외 없이 3ㆍ1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개략적으로 정리해보면, 3월 30일 수암면의 만세시위는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시작하여 수암면 사무소 앞으로 진행되었고 2,000여 명이 운집하였는데, 윤병소, 윤동욱, 홍순칠, 류익수 지사 등이 주도하였다.

3월 31일과 4월 2일에는 부천군 소래면 사천장(뱀내장)에서도 80~3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시흥군 군자면에서는 3월 29일과 4월 4일에는 장곡리, 거모리 등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김천복 지사가 주도했던 4일의 거모리 경찰관주재소, 군자면사무소 앞 시위에는 1,000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4월 6일, 군자면 장현리에서 권희, 장수산 지사가 군자면 옛 장터 시위를 계획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우리시 관내 각지에서 다수의 독립지사들에 의해 수차례의 만세시위가 발생하거나 계획되었는데, 이들 만세운동의 가운데 당시 관내에 거주하면서 독립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훈장이나 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권희, 김천복, 윤동욱, 윤병소, 장수산 지사 등 다섯 분이다. 이 다섯 분 중 오늘날 장곡동 출신인 장수산 지사에 대해 되짚어 보기로 한다.

장수산 지사
장수산 지사

생가 터는 숲속1단지 212동 부근

장수산(張壽山, 1900~1981, 일명 장순한(張淳翰)) 지사는 1900년 8월 7일 당시 안산군 마유면 응곡리(鷹谷里, 매꼴마을)에서 아버지 장주진과 어머니 김주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이곳은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시흥군 군자면 장곡리에 속했고, 오늘날에는 시흥시 장곡동에 해당한다). 자는 중옥(重玉), 호는 매암(梅巖)이다. 장곡동에 잘 알려져 있는 인선왕후의 아버지인 장유(張維)의 동생 장신(張紳)의 12대손이다. 장 지사의 재종손인 장곡동 장경창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장수산 지사의 생가 터는 숲속마을 1차 아파트 212동 주변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외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군자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장수산 지사의 판결문에 직업이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참작할 때, 어머니를 여읜 스무 살 무렵에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장수산 지사는 21세의 청년이었다. 장수산 지사는 당시 장곡리에 살고 있었고, 앞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장현리에 살았던 권희 지사 등과 함께 4월 7일 군자면 옛 장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장수산 지사는 권희 지사가 작성한 「비밀통고(祕密通告)」라는 제목의 격문을 마을 주민들이 돌려보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오는 7일 군자면 옛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려고 한다. 각 리민(里民)은 구한국 국기를 1개씩 가지고 와서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이종영(李鍾榮), 이종진(李鍾振), 이응수(李應洙), 이덕증(李德增), 이종형(李鍾亨) 등 마을 주민들의 손을 거쳐 장곡리, 장현리는 물론 이웃의 월곶리까지 전달되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4월 7일 만세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거사 계획 발각,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

장수산 지사와 권희 지사는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재판을 모두 함께 받았다. 판결문에는 앞서 언급한 격문(「비밀통고」)이 증거 자료로 제출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증거 자료는 현전하지는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판결문에 「비밀통고」의 기록 내용이 제법 인용되고 있어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그 내용을 일부 파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장수산 지사의 판결문 외에 당시의 상황을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장수산, 권희 지사의 만세시위 계획의 배경과 전말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 대한효도회 시흥시지회의 김규성 회장이 권희 지사의 인척인 고(故) 권돈행 선생을 구술ㆍ취재한 바에 따르면, 장수산 지사와 권희 지사는 친우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며, 7일의 만세 시위를 위해 사전에 여러 차례 회합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산 지사 판결문에 인용된 증인들의 청취서에 의하면 격문이 전파될 수 있도록 전달 경로를 지정했던 흔적을 살필 수 있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앞서 언급한 권돈행 선생의 구술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수산 지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모두 세 차례 재판을 받았다. 1심은 경성지방법원에서 1919년 5월 15일에 있었는데, 장수산 지사는 징역 10월, 권희 지사는 징역 1년에 처해졌다. 2심은 경성복심법원에서 7월 17일에, 3심은 고등법원에서 9월 25일에 각각 열렸지만, 항고한 2심, 3심은 모두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장수산 지사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의하면, 형의 집행은 9월 25일 즉각적으로 개시되었고, 이후 형이 감면되어 1920년 4월 28일까지 7개월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장수산 지사의 수형기록(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앞면)/ 국사편찬위원회
장수산 지사의 수형기록(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앞면)/ 국사편찬위원회

 

장수산 지사의 수형기록(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뒷면)/ 국사편찬위원회
장수산 지사의 수형기록(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 뒷면)/ 국사편찬위원회


학문에 뛰어났고, 장곡초 설립에도 앞장서

영어(囹圄)에서 풀려 난 장수산 지사는 일제강점기 시흥시 지역 인근의 문인들이 결성했던 ‘연성음사(蓮城吟社)’라는 시 모임이 1927년 주관했던 한시 전국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입선한 바 있어, 식자(識者)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바 있다. 당시 현상공모의 주제는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곡지」에 전래되는 연꽃 품종인 ‘전당홍(錢塘紅)’이었는데, 장수산 지사는 이 현상 공모에 5등으로 입상하여 1929년 발간된 수상집 '연성음사제일회집(蓮城吟社第壹會集)'에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연성음사제일회집(1929)
연성음사제일회집(1929)


장 지사의 재종손인 장곡동의 장경태 선생의 구술에 의하면, 장수산 지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명리학,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이후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 명석함을 바탕으로 후학들을 위해 지역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특히 군자국민학교 장곡분교(지금의 장곡초등학교) 설립에 앞장섰다고 한다.

장수산 지사는 1981년 5월 15일 83세의 일기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후 1990년 조국 독립에 기여한 공로가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만약 장수산 지사가 계획했던 1919년 4월 7일의 군자면 옛 장터 만세시위가 사전에 발각되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다면, 우리시 3ㆍ1운동과 만세시위의 경향은 판도가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두에 살폈던 것처럼 시흥시 지역의 3ㆍ1운동으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수암면 만세시위와 군자면 만세시위는 각각 3월 30일과 4월 4일에 일어났다. 만약 4월 7일의 만세시위가 성공했다면, 지역적으로 더 크게 확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장수산 지사의 묘역(거모동 11-2 소재)
장수산 지사의 묘역(거모동 11-2 소재)

 

5월 17일 매꼴공원에 기념비 세울 예정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내외의 활동에는 수없이 많은 독립지사들이 관련되어 있지만, 부끄럽게도 널리 알려진 분들보다 침묵 속에 묻혀 있는 분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김구, 신규식 선생 같은 임정 요인들, 안중근, 윤봉길 의사 같은 순국열사들이 우리 귀에 익숙한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지역의 독립 의지를 주동했던 분들은 유관순 열사 같은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역을 기반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분들, 동리의 앞 집, 옆 집 주민들을 일깨우고, 민족의 힘을 보태 모으고자 했던 한 분, 한 분의 노력과 의지, 고통과 인내가 없었다면, 3ㆍ1운동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전국에 들불처럼 퍼진 민족 자주와 독립의 열망’이라는 표현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활동의 규모와 영향력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앞일을 돌보지 않고 희생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그들의 정신에는 결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분들은 이러한 들불 같은 만세의 물결이 전국으로 이어져야만 독립이 실현될 수 있다는 자각으로 충만했던 분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장수산 지사도 지역에서 꾸준히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한 분, 한 분 모두 소중한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인 것이다.

시흥시에서는 지난 해 7월 20일 군자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천복 지사의 기념비를 죽율동 생금어린이공원에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산현동 출신으로 수암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윤동욱 지사의 기념비를 지난 3월 29일 산현공원에 마련하였다. 시흥시 관내에 거주하며 3ㆍ1운동에 앞장섰던 5명의 독립유공자의 기념비를 각각 연고지에 모두 갖출 계획이며, 이 글에서 소개한 장수산 지사의 기념비는 오는 6월 장곡동 매꼴공원에 세워질 예정이다. 비록 작은 기념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공원을 오가며 생활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의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헌신한 분들을 기념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본 내용은 장곡타임즈 지면 제53호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